[Why] 왜 살라딘은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나
왜 살라딘은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나 ▶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1187년, 살라딘은 예루살렘에서 대학살 대신 몸값 협상을 택했습니다. 그의 자비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사자왕 리처드와는 싸우면서도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는 장례비조차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비는 신앙이자 전략이었습니다. 1. 88년 만에 열린 성문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성 안의 기독교인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88년 전인 1099년, 제1차 십자군은 이 도시를 함락하고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을 대거 학살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복수의 차례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라딘은 대학살 대신 몸값 협상 을 택했습니다. 가난한 사람 수천 명은 몸값 없이 풀려났고, 성묘교회도 불타지 않았습니다. 2. 쿠르드족 장군, 술탄이 되다 살라딘의 본명은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입니다. 살라딘은 올바른 신앙이라는 뜻의 존칭 살라흐 앗딘에서 온 이름입니다. 그는 시리아의 군주 누르 앗딘 밑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집트의 실권을 잡은 뒤 이집트와 시리아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십자군 국가들은 처음으로 남북에서 동시에 포위됐습니다. 항목 내용 출생 1137년 무렵, 티크리트 출신 쿠르드족 가문 칭호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사망 1193년 3월, 다마스쿠스 3. 하틴, 자비에도 기준이 있었다 1187년 7월,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주력군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냥과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살라딘은 휴전 중에도 순례자 대상을 습격한 레이날드를 직접 처단했습니다. 하지만 기 왕은 살려 주었습니다.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 반면 템플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포로 약 200명은 처형됐습니다. 그의 자비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을 깬 자에게는 칼을, 항복한 자에게는 관용을 주었습니다. 4. 예루살렘의 몸값 계산서 성을 지키던 이벨린의 발리안은 항복을 받아 주지 않으면 성지를 무너뜨리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경고했습니...